韓國古裝劇中的王,歷史中是什麼樣的?

滬江韓語 發佈 2020-01-22T00:08:47+00:00

영화<쌍화점>에서 왕이 사랑하고 왕비와도 사랑하게 되어 삼각관계의 중심에 있던 호위 무사 홍림은 공민왕 대에 실존한 홍륜에 기초해 만든 인물로 보인다.실제 『고려사』에 남아 있는 공민왕의 최후는 섬뜩할 만큼 현실적이고 잔혹하다. 영화에서처럼 실제 공민

看電視劇,作為王,作為一國之首似乎是非常風光的事情,可以後宮佳麗萬千,可以決他人生殺大權於一身,可以無所不為。那麼,歷史上的王也是如此嗎?下面我們一起來看下曾在韓國幾部電影中出現過的王,看看真實歷史中的他們是怎樣的吧。

섬뜩하고도 잔혹한 공민왕의 최후 × <쌍화점>

可怕又殘酷的恭愍王的最後 X 《霜花店》

유하 감독의 영화 <쌍화점>(2008년 개봉)은 고려 말 원의 간섭기, 고려 왕실을 배경으로 한 격정 애정극이다. 고려가요 <쌍화점>을 영화 제목으로 한 것은 고려가 배경인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 남녀가 어울려 서로 즐기는 노래) 영화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일 테다. 영화의 중심 이야기는 왕과 왕비 그리고 호위 무사 사이에서 벌어진 묘한 삼각 애정 관계인데,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것은 고려 31대 왕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의 실제 시해 사건이다.

柳河導演的電影《霜花店》(2008年上映)是以高麗末期,在元朝的干涉下,高麗王室為背景的激情愛情劇。將高麗歌謠《霜花店》作為電影題目是因為高麗時期的男女相悅之詞就是在說這部電影。電影的中心故事是王和王妃還有護衛武士之間展開的微妙的三角愛情關係,這部電影的原型是高麗31代王—恭愍王的實際殺人事件。

영화 <쌍화점>에서 왕이 사랑하고 왕비와도 사랑하게 되어 삼각관계의 중심에 있던 호위 무사 홍림(조인성 분)은 공민왕 대에 실존한 홍륜(洪倫, ?~1374)에 기초해 만든 인물로 보인다.실제 『고려사』에 남아 있는 공민왕의 최후는 섬뜩할 만큼 현실적이고 잔혹하다. 영화에서처럼 실제 공민왕도 홍륜과 익비(보탑실리가 죽은 후 들인 후비)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은밀한 관계를 아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이를 알게 된 내시 최만생(崔萬生, ?~1374)이 아이의 아버지인 홍륜과 자제위의 청년들에게 이를 알렸다. 목숨이 위태로웠던 그들은 이때까지 모셨던 왕을 배반하고 즉각적으로 시역(弒逆: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일)에 참가하였다. 왕이 술에 취해 잠든 틈에 침전에 들어간 홍륜과 동료들은 뇌수가 벽에 튀어 붙을 때까지 왕을 칼로 내리쳐 죽였다.

電影《霜花店》中,被王愛著,也和王妃相愛的三角關係的中心人物—護衛武士洪麟(趙寅成)是基於真實存在於恭愍王時期的洪倫所描繪的人物。實際上,留存在《高麗史》中的恭愍王的結局現實和殘酷得可怕。就像電影中那樣,實際上,恭愍王也想要將洪倫和懿妃(寶塔失里死去後的諡號)所生的孩子當作自己的繼承人。並且還想要殺了所有知道這兩人的隱秘關係的人。知道這件事的內侍崔萬生將這件事告訴了孩子父親洪倫和子弟衛的青年們。性命岌岌可危的他們背叛了至今為止一直跟隨的王,馬上參加了弒逆。他們在王喝醉酒入睡的時候進入寢殿,洪倫和同僚們用刀砍死了王,砍到了他的腦漿都濺到了牆壁上。

아버지 선조의 구박과 질시를 극복하고 왕이 된 자 × <광해, 왕이 된 남자>

克服了父親宣祖的虐待和嫉妒,成為王的人 X 《光海,成為王的男人》

2012년에 개봉한 <광해, 왕이 된 남자>(감독 추창민)는 그동안 한국 역사 영화에서 잘 다루지 않던 광해군 대를 시대 배경으로 해 조선 중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 낸 영화다. 영화는 이런 광해군 시기의 긴장감 넘치는 정치 상황에서 왕의 유고(有故)로 얼떨결에 잠깐 왕 노릇을 하게 된 시정의 만담꾼 하선(이병헌 분)을 통해 왕위의 지엄함과 고뇌를 보여 준다.

2012年上映的《光海,成為王的男人》(導演秋昌民)是以過去韓國歷史電影中很少講述的光海君時期為時代背景的電影。電影在光海君時期滿是緊張感的政治情況下,王因為一些原因稀里糊塗下將王的位子讓市井的相聲藝人河善(李秉憲)擔任,展現王位的嚴謹和王的苦惱。

광해군은 왕이 되기 전부터 심리적으로, 물리적으로 많은 고초를 겪은 사람이다. 이렇게 된 데는 그의 아버지 선조의 영향이 크다. 이 글에서는 광해군이 왕이 되기까지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光海君是個在成為王之前心理上和外在上經歷了許多苦楚的人。之所以會這樣大多是受了他父親宣祖的影響。在這裡主要講光海君為王之前的事情。

선조는 자신의 왕권에 열등감이 많았다. 명종 대까지는 태조 이성계의 혈통을 정통으로 잇는 사람들이 왕이 되었는데,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의 남동생 심의겸의 후원 덕에 중종의 후궁 소생 손자인 선조가 왕으로 발탁되었다. 신하 덕에 왕좌를 얻은 선조는 언제나 자신의 뒤를 이를 세자는 제대로 된 적장자이기를 바랐다. 그런데 선조는 자신의 바람과 달리, 적장자를 낳아 줄 왕비인 의인왕후와 금슬이 그다지 좋지 못했고, 세자 자리를 비워 두어 후궁 소생 왕자들을 허무한 정쟁에 휩쓸리게 했다.

宣祖對自己的王權很自卑。至明宗時,正統地繼承了太祖李成桂血統的人被成了王,而隨著明宗沒有後嗣就死去,因為明宗妃子仁順王后的弟弟沈義謙的支持,中宗後宮所生的孫子—宣祖被選為王。因為臣子的助力獲得王位的宣祖一直都對繼自己之後的世子能成為令人滿意的繼任者。但是,不同於自己的期待,宣祖和生下繼承者的王妃懿仁王后關係並不好,他空置世子之位,讓後宮所生的王子們陷入了徒勞的政治鬥爭之中。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 소생 아들 중 공빈 김씨가 낳은 둘째 아들로 왕의 재목으로 가장 싹수가 있고 총명했다. 그러나 선조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광해군은 불안에 떨게 했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터졌다. 파죽지세로 올라오는 왜군을 피해 궁을 떠나면서 선조는 후사를 걱정하는 신하들의 청에 떠밀려 광해군을 마지못해 세자로 정했다. 피난 이후 선조와 광해군이 보여 준 태도는 판이했다. 선조가 계속 북진하면서 명의 처분만을 바라고 여차하면 나라를 버린 채 중국으로 망명할 계획까지 세우는 동안, 열여덟 살의 세자 광해군은 전쟁터를 직접 찾아다니며 의병과 관군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민심은 수도를 버리고 떠난 선조 대신 광해군을 향하고 있었다.

光海君在宣祖後宮所生的兒子中,是恭嬪金氏所生的次子,是最有王者之才,也最聰明的。然而,因為宣祖沒辦法痛快地做出決定,所以光海君很不安。就在那時爆發了壬辰倭亂。為了避開以破竹之勢衝上岸的倭寇而離宮時,宣祖被為擔心後嗣的臣子所請,不情願地立了光海君為世子。避難後,宣祖對光海君的態度變得截然不同。在宣祖繼續向北,只求活命,還計劃一有事的話就拋棄國家,亡命到中國去時,年僅18歲的世子光海君直接前往戰場,慰問和鼓勵義兵和正規軍。民心從拋棄首都離開的宣祖上轉移到了光海君身上。

이 무렵 임진왜란이 끝났다. 선조는 전쟁 동안 자신이 보인 비겁한 태도를 수습할 길이 없는 민망함과 급부상한 아들 광해군에 대한 질투에 그를 대놓고 구박하기 시작했다.나이 오십에 홀아비가 된 선조는 열여덟 살 처녀에게 새장가를 들었다. 선조는 젊은 왕비를 총애했고 그 덕에 오십 줄에 정비 소생 아들, 적자를 얻었다. 적장자가 아니란 이유로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심지어 질투까지 받은 아들 광해군은 그야말로 조용히 엎드려 세월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지 않았는지 광해군을 내쫓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올리기 전, 선조가 사망하고 광해군은 예정되어 있던 왕좌를 차지한다.

在這個時候,壬辰倭亂結束了。宣祖因為在戰爭時期自己所展現的卑劣態度而無法收場感到尷尬以及對威信快速上升的兒子光海君的季度,他開始明目張胆地虐待光海君。年紀50成了 鰥夫的宣祖娶了才18歲的少女。宣祖寵愛年輕的王妃,因此在50多歲的時候得了正妃所生的嫡子。以非嫡的理由不得父親的承認,甚至還被嫉妒的光海君只得安靜地蟄伏,等著時間過去。然而不知是不是上天也有眼,在宣祖趕走光海君,將永昌大君立為世子之前,宣祖死了,光海君坐上了預定的王位。

누가 정조를 죽이려 했나 × <역린>

是誰想要殺了正祖呢 X 《逆鱗》

정조는 흔히 조선의 중흥기를 이끈 왕으로 알려졌으며 세종과 더불어 성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학계에서 정조 시대를 다양하게 조명하는 연구가 많아졌는데, 이런 학문적 성과가 문화계로 넘어가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과 영화, 드라마 등을 많이 만들어 냈다.조선 시대 왕실에는 잔혹한 스캔들이 꽤 많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중 가장 말초적인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임오화변이다. 69세 아버지 영조가 28세 아들 사도세자를 음력 5월, 즉 양력으로 6월에서 7월로 넘어가는 한여름에 8일간 뒤주에 가두고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게 해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 바로 임오화변(1762)이다.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망극한 사건이 벌어졌을까? 사건의 원인을 두고 여러 의견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이 부자를 사이에 두고 일어난 붕당 간 갈등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正祖作為帶領朝鮮中興期的王而廣為人知,和世宗一起被奉為聖君。特別是在1990年代以後,韓國史學界聚焦正祖時期的研究越來越多,這種學問成果影響了文化界,以這一時代為背景的小說和電影,電視劇等大舉出現。朝鮮時代王室雖然有很多殘酷的傳聞,但不管怎麼說,其中最讓人感興趣的就是壬午禍變。69歲的父親英祖將28歲的兒子思悼世子在陰曆5月,即陽曆的6月到7月的大暑天裡,整整8天關在了米櫃里,不給吃不給喝直到死亡的事件就是壬午禍變。他們之間到底發生了什麼事才會導致這樣悲慘的事件發生呢?對於事件的原因雖然有很多不同的意見,但其中之一說是因為這對父子之間發生的朋黨矛盾。

정조가 왕세손(왕위를 이을, 왕의 손자)이던 시절,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 측은 정조가 왕위를 잇지 못하게 하려고 갖가지 위기 속에 정조를 몰아넣었다. 그러나 정치적 입지가 불리하다고 여긴 정조는 자중자애 근신을 거듭하며 노론의 위협과 할아버지 영조의 시험을 통과해 냈다.정유역변은 정조가 즉위한 다음 해인 1777년(정유년) 7월 28일 에 벌어진 정조 암살 미수 사건이다. 영화 <역린>에서는 암살범들이 대놓고 궁에 들어오는 상당한 규모의 액션 장면으로 과장되었는데, 실제 정유역변은 사건 당일에 조용히 처리되었다. 정조가 개인 서재인 경희궁 존현각에서 주위를 물리고 책을 읽고 있는데, 지붕에서 발소리가 들리고 기왓장이 깨지는 소리까지 났다. 놀란 정조가 급히 사람들을 불러 살펴보게 하니, 존현각 지붕의 기왓장이 밟혀 깨진 채 흩어져 있었다. 왕이 있는 곳에 몰래 침입하려는 자라면 자객이 분명했다. 위기를 느낀 정조는 곧 창덕궁으로 옮겨 갔는데, 7월 28일 존현각 지붕에 오른 자객이 8월 11일 창덕궁에 다시 침입하려다가 붙잡힌다.

正祖作為王世孫(將繼承王位的王的孫子)的時候,因為殺死他的父親思悼世子的老論派為了不讓正祖繼承王位而將正祖推入各種危機之中。然而,在政治立場上不利的正祖自重自愛,謹慎小心,成功躲過了老論的威脅和爺爺英祖的考驗。丁酉叛亂是在正祖即位之後的第二年,即1777年7月28日發生的正祖暗殺未遂事件。電影《逆鱗》中,逆賊們明目張胆入宮的大規模武俠場面是被誇大了,實際上,丁酉叛亂在事件當日被安靜地處理掉了。正祖在個人書房慶熙宮的尊賢閣揮退了左右讀書,他聽到房頂上傳來腳步聲,甚至還聽到了瓦片裂開的聲音。受驚的正祖馬上叫人查看,尊賢閣的屋頂瓦片被踩裂四散。想要偷偷潛入王所在之處的人必定就是刺客。覺得危險的正祖馬上搬到了昌德宮,7月28日上了尊賢閣屋頂的刺客在8月11日再次試圖入侵昌德宮時被抓到了。

배후가 밝혀진다. 정조의 즉위를 방해하던 노론 강경파 홍술해(洪述海, 1722~1777)의 아들 홍상범(洪相範, ?~1777)이 주축이 되어 정조의 암살을 꾀한 것이다.

背後的指使者被揭曉。是以妨礙正祖即位的老論強硬派洪述海和他的兒子洪相範為主策劃的暗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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